원장 스토리

아촌 이삼우 원장

기청산식물원은요

포항의 북쪽 맑고 푸른 땅 청하淸河에 한 식물학자가 근 반세기 동안 초지일관 일구어온, 흔히 볼 수 없는 식물원다운 식물원입니다.

원장 李森友선생은 1964년 서울대학교 농대임학과를 졸업하고 경향 유수 직장의 유혹도 뿌리치고 소년시절의 꿈을 좇아 곧장 낙향하여 농부의 외길을 시작하였답니다.

그 당시 이미 거센 산업화바람으로 농촌을 떠나는 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생은 농업으로서도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보람 있게 잘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객기가 발동하기도 한 것이지요.

당초에는 중학교 교편을 잡고 부업처럼 농사를 시작하였다가 1966년 청하중학교 재단 농장관리인으로 부임하여 과수농업을 하면서 한편으로 선친으로부터 장기 저리의 지원을 받기도 하여 독자적으로 농장을 확장하고서 향토고유수종연구개발보급을 태마로 하는 기청산농원을 설립하였답니다.

그 당시 식물사대주의에 침착된 조경계에 환멸을 느끼고 우리 땅엔 우리 것이 제격이라는 새바람을 일으키는데 주력을 하였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난개발이 동반된 산업화 시대 속에서 인심은 자연과 멀어지고 국민들의 심성까지도 거칠어지면서 배달민족 본연의 천성을 이탈 표류하는 현실을 감지하게 된 원장님께서는 농원에서 식물원으로 방향을 수정하고서 30여 년간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인간에게 유익한 식물원을 모토로 매진하여 이날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 기청산식물원은 이곳에 들리는 이들이 식물과 교감할 수 있게 함으로서 식물세계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조성 관리 운영하고 있습니다.

4철 내내 새들의 지저귐으로 꽃이 피는 천연의 숲과 같은 곳, 수천억 꽃들의 향과 특별한 나무들의 피톤치드가 넘쳐흐르는 곳, 이 속을 거닐고 있으면 오만 번뇌가 멈춰지고 맑고 푸른 아이디어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곳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오십시오, 그리고 자주 들리십시오.

심신의 안정과 삶의 성장을 위한 후회 없는 알찬 투자가 되실 겁니다.

나무와 꽃과 인간사 이야기

제목현충일이 올 때마다 마음이 아린다2024-06-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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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유감

 나는 젊은 시절부터 돈 안되는 일 골라가면서 즐겨하는, 좀 생소한 인간이라는 말을 지인들로부터 곧잘 듣곤 했다.

소시적부터 재물도 세상 이치상 돈이 따라오게해야지 돈을 따라가서야 못쓴다는 철학이 자리잡은 탓이기도 하다.

객기(客氣)라고 할까? 남들이 푸대접하는 일에 곧장 푹 몰입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향토고유수목 연구 개발 보급운동도 이나라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것 같다. 국익차원에서가  아니라  조경현장이 온통 외래수종으로 범람하는것이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하였다. 

나는 우리것을 유난히 밝히는 일들을 곧잘 벌려 왔었다. 그리고 소외된 우리것에 대한 애정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향토사연구에도 몰두하게 된것이다. 그 당시 세인들이 눈여겨 보지않는 그늘진 분야였다.

우리 몸속 새포 하나하나 속에 DNA가 들어 있듯이 내고장 구석구석에 짜릿한 역사와 전설들이 낙엽쌓인 산골 골짜기처럼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되어 토 일요일은 농삿일을 팽게치고 포항[그당시 영일군과 포항시] 구석구석을 누비며 자료수집이며  검정 정리에  십여년을 몰두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 송라면 화산 불에 임진왜란 당시의 처절했던 전적지가 발굴된 것이었다. 

향토사가(鄕土史家) 박일천 선생의 저서 일월향지(日月鄕誌) 속에 기록된 내용을 숙지하고 현장 조사를 몇차레 했다. 다행히 이곳 화산마을에 향토사에 밝은 권명술씨라는 원로를 알게되어  구전(口傳)으로 간신히 전해내리는 이 전투사를 샅샅히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임란 당시, 아마 정유재란 때로 추리되는데, 울산에 성곽을 축조하여 똬리를 틀고 있던 가또기요마사의 수송군단 소속 왜선이 대진 마을 포구에 정박하고 인접한 백사장 한 켠에다 샘을 파고 진을 치고서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민패가 날로 심해지자 청하 덕천리에 주둔하던 찰방장이 월포 수군만호군과 의병을 소집하여 긴급 출정을 하였다.  군세가 300여명이긴 하지만 대다수의 의병으로서 급히 모은 장병들이라 전투능력이 턱부족한 실정이었다. 오직 의협심으로 분발하여 출정을 한 것이다.  

결전 현장인 화산불에서 1km 남짓 거리에 있는 대동수[대전리 마을숲]에 어둠을 타고 몰래 운집 대기하고 있다가 자정이 지났을 무렵 으스름 달밤에 기습 공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술이 뛰어난 왜병의 칼춤에 당하질 못하고 거이 전멸하다 시피 패전을 하였고 왜병들은 사상자들을 버린체 배를 타고 철수한 것이라 구전되고 있다. 

필경 출정 대장격인 찰방장이며 정규군 장교급들 일부는 패색이 짙어지자 혼비백산 달아났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지 않은 전쟁사가 되어 구전으로만 전수되어 내린것이라 추리되고도 남는다. 

전란 속에 주민들이 시신들을 무더기무더기 끌어모아 모래를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무덤골 일원을 썩은 숭이네 고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400여년 긴 세월 동안 아무도 찾아와 술한잔 치는이 없었으니 무명용사의 넋들은 원혼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치하때 송라국민학교교장은 일본인이었는데 어느 고요한 달밤에 제물(祭物)을 장만하여 이곳을 찾아가서 제단을 차리고 통곡을 하는 것을 목격한 화산마을 주민들이 구전으로 전해내리고 있었다.

2005년부터 현충일을 기하여 노거수회에서 임란 화산불 전몰 무명용사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해서 18년 째 지내왔었다. 수백년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버림받은 영혼들이라 지역 문화 예술 단체들이 번갈아 동참하여 한풀이를 성대하게 치루곤 했다. 시장이며 때로는 국회의원 교육장을 비롯하여 인근 주둔 군 장병들이며 유지들, 학생들까지 참여하게되어 해마다 체계화된 행사로 지속되어 왔다. 

이 일원은 해당화 동해안 최남단 자생지로서 식물학적으로도 중요한 천연자원이기에 노거수회는 해마다 해당화군락지 복원사업도 펼처왔었다. 전몰 장병들의 혼령이 붉은 해당화로 피어나는  멋진경관을  꿈꾸면서 위령제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심고 가꾸는 일을 열성으로 해왔었다.

 

근년에 코로나 사태로 인해 4년째 공식적인 큰 행사는 어우르지못하고 소수 뜻있는 회원들만 참석하여 소박하게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노거수는 우람하다. 그래서 보는이의 가슴을 감동시킨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한결같은 보살핌과 사랑이 자손대대로 이어져 내렸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한결같지않은 모든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 인생의 성공자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는 배를타고 노도를 헤치며 목적지를 향해 억척같이 나아간 자들이다.